새벽 이슬이 맺힌 검은 코트.
중절모를 눌러쓴 사내가 뚜벅뚜벅 역내로 들어섰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역.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대한민국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발걸음이 끊긴 폐역이 되어 있었다.
서울이 폐허가 된 건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하늘을 검게 가르며 나타난 존재,
전설로만 전해지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첫 번째 재앙은 멕시코에서 시작됐다.
하늘을 비상하던 드래곤은 강력한 화염의 숨결로 도시 하나를 통째로 태워버렸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미군이 개입했지만,
막대한 희생만 남긴 채 토벌은 실패로 끝났다.
그 이후였다.
드래곤들은 파괴한 지역에 터를 잡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세계는 경악했다.
미군은 현 인류 군사력의 상징이었으니까.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국, 인도, 일본, 그리고 한국.
드래곤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인류는 그들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한국에 나타난 드래곤은 서울에 자리 잡았다.
결국 모든 행정 기능은 세종시로 이전되었고,
서울은 지도 위에서 사실상 지워진 도시가 되었다.
그런 서울 한복판.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서울역에 인간 사내 하나가 발을 들였다.
곤히 잠든 드래곤의 앞으로,
새파란 유리구슬 하나가 또르르 굴러갔다.
검은 코트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긴 것이었다.
드래곤의 코앞에 이르자
유리구슬에서는 서늘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척을 느낀 드래곤이 숨을 들이켰다.
화염의 숨결을 내뿜으려는 순간,
몸속에서 불길이 거꾸로 치솟았다.
화염이 역류했다.
고통에 찬 비명이 역사를 울렸다.
“크아아아악!”
사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잘 있었냐? 불용아.”
드래곤이 고개를 들어 사내를 노려봤다.
“네놈은… 누구냐…!”
사내는 천천히 중절모를 들어 올렸다.
“맞아.
네가 그토록 찾던 놈.”
짙은 미소와 함께 이름이 떨어졌다.
“드래곤 슬레이어, 파이란이다.”
'조각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심연, 기억의 파편, 검은 비, 폐허의 도시, 은빛 안개] (0) | 2025.10.07 |
|---|---|
| [화로, 백일몽, 전신주, 은박지, 모래시계] (1) | 2025.09.22 |
| [체념, 세면대, 우편함, 파손, 캔커피] (0) | 2025.09.21 |
| [기차역, 우산, 사탕, 자정, 기억] (1) | 2025.09.21 |
| [개표, 복권, 쇄골, 노점상, 갈라지다] (0) | 2025.09.21 |